부족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나의 행동
저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서 보이는 반복적인 문제, 즉 마감에 시달리거나 일정을 잊어버리거나 또는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 등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되는 상황이 왜 발생하는지 분석한 책이에요. 두 저자는 제목 그대로 이것이 '결핍'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같은 것을 '결핍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결핍 상태에는 장점도 있습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코앞에 닥쳤다면 저절로 집중력이 오르는 경험을 다들 해봤을 거예요. 이 상태에서 무사히 일을 끝마치면 마치 최고의 퍼포먼스를 낸 것처럼 뿌듯함마저 느껴지잖아요. 그 전까지 무한히 놀면서 미루던 건 생각도 안 하고요. 저자는 이렇게 결핍의 장점도 있음을 인정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단점이 더 크다고 설명합니다.
시간에 쫓기느라 제대로 검토하지 못해 실수가 발견되는 것은 물론이고, 늦장을 부리다가 지각하거나 돈이 없으니 고금리 대출을 받기도 하고,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데 세일 상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소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겠죠. 저자는 이러한 행동을 '터널링'에 빠졌다고 합니다. 마치 터널 속에 들어간 것처럼 인지 상태가 좁아지는 것을 말해요. 인지 상태가 좁아진 결과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못하고 특정한 문제 하나에만 집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실수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면 점점 더 깊은 터널링에 빠지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는 '대역폭'을 늘리라고 조언합니다. 우리가 터널에 들어가면 중간중간 꼭 비상 출구가 마련되어 있잖아요. 그것처럼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두라는 거예요. 저자들이 말하는 ‘대역폭을 늘린다’는 것은, 더 열심히 버티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무너지지 않도록 빠져나갈 공간을 미리 만들어두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책에서는 병원의 수술실 준비하는 것으로 예를 들었거든요. 한 병원에서 항상 모든 수술실을 이용해 스케줄을 짜다 보니, 응급 수술 환자가 들어올 경우 다른 수술 스케줄까지 어그러지며 혼란해졌고, 의사 역시 대기 시간이 늘어나며 피로 때문에 컨디션 저하가 심했다고 해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에 수술 스케줄을 짤 때 아예 한 수술실을 비워두고 나머지만 활용하는 방식을 썼더니, 응급 환자는 저 빈 수술실을 이용하면 되니까 실질적으로 수술실 개수는 줄었지만 시간적 여유는 훨씬 늘어났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도 항상 대역폭을 넓혀서 시간이나 돈뿐만 아니라 감정과 체력에도 여유를 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참 옳은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것은 항상 실천이 어려운 법이잖아요. 심지어 저자들도 이 책을 쓰면서 마감에 늦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가겠죠?ㅋㅋ 그런데 우리가 복지 정책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무조건 돈을 줘서 해결하려는 것이 왜 역효과가 나는지, 왜 빚이 늘어날 것을 알면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등 사회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알기 쉬운 용어로 정의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책이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라는 말을 습관처럼 쓰고 있다면, 이 책은 그 말이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 패턴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닐 거예요. 당장 삶을 바꿔주지는 않지만, 왜 늘 같은 늪에 빠지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라 그런 점에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센딜 멀러네이선, 엘다 샤퍼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이경식 옮김 빌리버튼
소장기관
밀린 책을 느리게 읽는 망한 사랑 소믈리에
sozang.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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