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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녹나무의 파수꾼>

일어번역가 이진아 2025. 3. 10. 18:25

마음을 전해주는 신비한 녹나무를 지키는 일을 맡은 청년과 그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에요.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어렵게 살다 인생의 나락에 떨어진 청년 레이토가 아버지의 부정을 의심하는 여성 유미와 함께 녹나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맡은 파수꾼이라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에요. 제목대로 녹나무와 파수꾼을 둘 다 다루는 내용이랄까.

 

후속작으로 <녹나무의 여신>이 나왔던데 처음부터 후속작을 염두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이 책은 좀 프롤로그 느낌이 강하더라고요. 일단 주인공이 녹나무의 능력을 파악한 것을 드러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 독자도 자연스럽게 느리게 읽는 것을 추천하는 듯합니다. 막 빠르게 후루룩 읽을 책은 아니에요. 구조 자체는 간단하고 또 물론 우리 히가시노 게이고 선생님 글답게 문장도 잘 읽히지만, 그보다는 녹나무가 지닌 힘을 생각하면서 인물의 마음이 어떨지 가만히 생각하기를 권유하는 느낌이에요.

 

아마 키포인트는 자신이 후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나무에 맡긴다는 게 아닐까요. 재산에 관한 것이라면 문서로 작성하거나 직접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마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직접 말하더라도 그게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질지는 알 수 없는 법이잖아요. 어쩌면 상대가 나의 말을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무에 마음을 맡기고 전달받는 것 역시 나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거든요. 과연 그러고도 마음을 맡길 가치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 마음에 그럴 가치가 있나? 여기에 더해 마음을 받는 쪽도 상대의 마음이 완전히 전해진다는 점이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요. ~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완전 부담임.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걸 생각하면 과연 이런 나무가 진짜 있다고 해도 내가 과연 이용할지 상상하게 돼요.

 

나의 흔적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그것이 역사를 만든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분위기에 비해서는 무거운 테마인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약간 반전처럼 나오는 내용까지 더해서 가족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돼요. 근데 아쉬운 점은 주인공의 설정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레이토가 여성인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거예요. 나만 그런가? 레이토에게 파수꾼 일을 맡기는 치후네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유미와 협력 관계가 되어 함께 녹나무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도 같은 여성이었으면 서로 더 공감하고 나서기 좋았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은근히 레이토가 유미를 좋아하는 듯이 묘사하는데 두 사람의 모습에서 로맨스의 ㄹ도 안 느껴져서요. 또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 선택하는 길이 술집인 것이 극의 분위기와 안 맞는 것 같아요. 아니 저쪽 나라도 물장사 하는 거 딱히 좋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 선택지가 안이한 것 아님?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면 쿠팡이나 가라 진짜.

 

히가시노 게이고 <녹나무의 파수꾼>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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