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수학자 료지의 유품으로 수학계의 난제 중 하나인 '콜라츠 추측'에 관한 연구 노트가 발견되면서 그의 친구이자 수학자인 구마, 그리고 두 사람의 대학 입학 동기지만 공학으로 진로를 바꾼 사야가 료지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과거 이야기와 노트 발견 이후에 그것을 해석하려는 구마의 현재 이야기가 교체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예요. 료지가 얼마나 위대한 천재인지 보여주는 것보다는 주변 사람과 자신이 느낀 그 수학적 감각을 공유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좌절하는 모습이 더 중점적으로 묘사된 게 특징이에요. 사실 수학계는 노이만처럼 누가 봐도 천재인 인물이 여럿 나온 상태라 픽션으로는 묘사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인물의 인간적인 묘사에 집중한 건 영리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초반에 료지는 많은 천재가 그렇듯이 주변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거쳐서 한 교수의 추천으로 대학에 와서야 구마와 사야라는 동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문제를 얘기해도 관심을 가지고 도전해서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평생 이렇게 수학만 연구하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하지만 그냥 수학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인 료지와 달리 구마는 똑같이 수학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료지처럼은 할 수 없다는 열등감 때문에 지도교수의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를 선택해서 결별하게 되고, 자신이 '지금 당장' 관심 있는 것을 해야 하는 성격인 사야는 수학을 통해 공학과 예술의 접목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나고 그쪽으로 뛰어들게 돼요. 심지어 지도교수마저 료지의 천재성에 자극받아 자신도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싶다며 학교를 관두고 연구소로 들어가고 맙니다. 여기서 료지의 비극이 시작되게 돼요.
료지의 좌절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계속 같은 연구실에서 서로 영감을 주며 수학 연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며 각자 자신만의 진로를 찾아 떠나게 된 것이에요. 료지 입장에선 그거잖아요. 우리 같이 평생 같은 장르 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친구들은 장르 갈아타고 나만 여기 남은 폐허 그 자체인 상태. 친구들은 졸업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러 나간 것이고, 수학적으로 말하면 '다른 풀이'를 찾은 것이기 때문에 붙잡을 수도 없는 상황인 거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도교수의 후임으로 온 새로운 교수가 료지와 스타일이 전혀 달라서 맞지 않았다는 겁니다. 료지는 천재답게 어떤 문제가 있으면 감각적으로 답을 알아내는 편이에요. 료지 입장에서는 이미 답을 알아냈고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는 많은데 굳이 과정을 꼼꼼하게 다 보여줘야 하나? 하는 것이고, 후임 교수는 진짜 문제를 푼 사람은 답을 알아낸 사람이 아니라 풀이 과정을 증명한 사람이라는 쪽이에요. 모두가 료지 같지는 않으니 풀이를 통해 검증이 되어야 이해하는 만큼 아마 많은 사람이 교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료지 입장에서는 답이 틀린 것도 아닌데 자신이 낸 답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미치겠는 거예요.
료지는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떠나며 생긴 상처와 연구를 인정받지 못한 충격으로 인해 알콜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천재가 알중이라니... 너무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처음 술을 마시게 된 묘사가 나름 설득력 있어서 좋았어요. 사실 천재성이 드러나는 장면보다 중독에 빠지는 장면이 더 잘 쓰여 있어서 내가 보는 세상을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의 좌절감이 더 강렬하게 드러나더라고요. 작중에 료지가 자신이 문제를 풀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풀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하거든요. 시간이 지나 료지가 남긴 문제가 풀리는 순간이 바로 료지가 보는 세상이 이해되는 순간이고, 그렇게 그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어요.
岩井圭也 <永遠についての証明> KADOKAWA / <영원에 관한 증명> 김영현 옮김 클
소장기관
밀린 책을 읽기 위한 1인 독서모임
sozang.stibee.com
'소장기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리 유키코 <후시기> (0) | 2025.03.22 |
|---|---|
| 히가시노 게이고 <녹나무의 파수꾼> (2) | 2025.03.10 |
| 엘리너 허먼 <독살로 읽는 세계사> (1) | 2025.02.28 |
| 아시자와 요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 (0) | 2025.02.28 |
| 쓰네카와 고타로 <야시> (0) | 2025.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