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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 <가을비 이야기>

일어번역가 이진아 2025. 10. 30. 19:16

가을비처럼 스산한 일상 속 공포

 

가을비를 배경으로 일상 속에서 펼쳐진 절망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는 단편집이에요. 4편이 실려 있고 전체적으로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두려움을 테마로 쓴 느낌입니다. 막 엄청나게 끔찍하고 징그럽고 이런 호러가 아니라 정말 추적추적 내리는 비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무서움이에요. 그래서 감상도 <검은 집>이나 <천사의 속삭임>처럼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된 느낌보다는 '아이구 저런...' 하게 된달까.

 

개인적으로는 '아귀의 논'하고 '푸가'가 좋았습니다. '아귀의 논'은 분량은 정말 짧아서 줄거리를 말하기도 좀 어려운데 이야기의 소재부터 그걸 풀어가는 방식과 분량까지 다 결말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그 느낌이 좋았어요. 따지고 보면 무서울 일은 하나도 없고 뭐 귀신이 등장하고 이런 것도 아닌데 내가 결말에서 느낀 그 기분을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평생 느끼겠구나 생각하니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걸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나 싶기도 해요.

 

'푸가'는 호러 소설 작가가 실종되고 편집자가 그가 남긴 미완성 원고를 읽는 형식으로 실종된 작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짐작하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이 작가는 어릴 때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동을 겪었다고 해요. 그리고 집에는 작가 대신 작가가 이동한 장소와 관련된 것으로 가득했고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 이러한 이동을 또 겪게 되고 작가는 언젠가 이 일로 죽게 될 것이라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 단편의 좋은 점은 먼저 작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글로 묘사하는데 순간이동된 장소가 다양해서 질리지도 않고 그 장소마다 서로 다른 공포가 보여서 재미있었어요. 특히 작가가 이동되지 않도록 영능력자를 부르는데 그 후에 꿈을 꾸기 시작하거든요. 이 꿈이 뭐랄까 '호러 작가가 생각한 최고로 스릴 있는 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긴장감이 넘쳐요. 저는 기시 유스케의 글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비가 내리는 장면 묘사와 누군가에게 쫓기는 장면 묘사거든요. 제목부터 비가 들어갔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꿈에서 추격당한다..?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또 작가가 점점 미쳐가는 과정이 잘 드러나서 결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데 그 상황 자체가 순간적으로 시각화될 만큼 잘 쓰여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머지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으나 묻혀버린 비운의 가수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와 '고쿠리상'의 또 다른 버전에 관한 이야기예요. 가수 이야기는 약간 '아귀의 논'과 감성은 비슷한데 천재적인 가수의 전기를 쓰게 된 별로 재능이 없는 작가의 대비가 인상적이더라고요. 인간의 욕망은 정말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고쿠리상'은 반드시 네 명이 해야 하는데 주술이 성공하면 한 명은 무조건 사망하지만, 나머지는 절망적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러시안 룰렛' 형식인 게 특징이거든요. 그래서 초등학생인데도 이미 인생의 막다른 길에 몰린 네 명이 이것을 시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한 명은 무조건 죽긴 하지만 대신 고통 없이 죽게 되는데 내가 만약 죽을 병에 걸렸다면 한 번 해볼 만하겠죠? 반대로 인생이 망할 것 같은데 마침 근처에 곧 죽을 사람이 있다면 역시나 해볼 만하겠죠? 보통은 죽을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까. 근데 과연 이게 그런 편리한 주술일까 하는 내용이에요. 이건 발상은 재미있었는데 결말은 너무 설명이 길어진 느낌이라 별로 취향은 아니었어요.

 

전체적으로 소나기처럼 막 퍼붓는 느낌이 아니라서 그보다는 좀 더 가라앉은 느낌의 호러 소설을 읽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무섭다고 느낀 부분도 '푸가' 외에는 딱히 없었거든요. 대신 '저런 감정은 느끼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은 강하게 들었어요. , 그리고 서술하면서 날짜가 드러날 때가 있는데 제 생일도 있더라고요. 제 생일이 날짜만 보면 뭔가 소설에 쓰일 만한 숫자 조합은 아닌 느낌인데 이렇게 보니까 좀 재미있었어요.

 

貴志祐介 <秋雨物語> KADOKAWA / <가을비 이야기> 이선희 옮김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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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책을 느리게 읽는 망한 사랑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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