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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후미노리 <차광>

일어번역가 이진아 2025. 10. 31. 19:46

거짓된 인간의 진실된 사랑?

 

사고로 여자 친구를 잃은 허언증 청년이 여자 친구의 손가락을 병 속에 넣고 다니는 이야기예요. 한 줄로 요약하니 미친 사람에 관한 이야기 같은데 그냥 그거 맞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정신인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소설이에요.

 

주인공은 대학생 남자로 심각한 허언증을 앓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자신의 말처럼 그대로 흉내 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재미있게 해준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 모든 행위가 꾸며낸 것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을 못 하니까 또 허언을 하게 되고, 그 허언으로 만들어진 상황을 또 허언으로 전하는 등 진실된 부분이 전혀 없어요. 심지어 본인은 거짓이라는 자각이 없으니까 그를 이상하게 보는 타인의 시선도 깨닫지 못할 정도거든요. 소설이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되니까 진짜 읽는 내내 정신 나갈 것 같더라고요.

 

그런 주인공이 유일하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느낀 사람이 바로 죽은 여자 친구인 미키입니다. 주인공은 미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잘라낸 손가락 하나를 포르말린 병에 넣어서 항상 갖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는 마치 미키가 살아서 미국 유학을 간 것처럼 거짓말을 해요. 이야기 속에서 미키는 초반에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지만, 어느새 점점 영어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영어로 쓴 글이 남에게 인정받는 수준까지 될 만큼 보람찬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어요. 이 묘사가 독자 입장에서는 미키가 이미 죽은 걸 아니까 설정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주인공이 그걸로 위안을 받는 것도 아니까 허언증도 쓸모가 있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손가락이 든 병입니다. 아니 사실 여자 친구와 언제나 함께 있고 싶더라도 남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할 거면 그냥 집에 놔두면 되잖아요? 아니면 그냥 뻔뻔하게 이게 내 여자 친구 손가락이다! 나는 이만큼 얘를 사랑해! 하고 나서든가.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은 본인이 허언증이라는 것을 아예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냥 평범한 대학생인 거예요. 평범한 대학생은 사람의 손가락을 들고 다니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누가 볼까봐 신경 쓰이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확실히 갖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자꾸 행동이 수상해지고 그걸 숨기려고 또 거짓을 말하게 되는 부정적인 연쇄가 일어나는 거예요.

 

읽다 보면 주인공이 타인의 눈에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왜 허언증이 생겼는지 알 수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온통 거짓된 인생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여자 친구에 대한 마음마저 거짓일까 하는 거예요. 책에 쓰인 줄거리 보면 순애인가, 광기인가 이렇게 쓰여 있던데 저는 순애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정신인 부분은 하나도 없다고 하긴 했지만 광기는 좀 모자란 거 같아요.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알콩달콩 사랑하고 싶었을 청년만 있을 뿐이지. 여성을 가볍게 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해서 그런 묘사를 읽기 싫은 분에게는 비추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의 불안한 심리를 읽고 싶은 분에게는 추천할게요. 저는 제 망사 컬렉션에 넣기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긴 한데 그래도 괜찮게 읽었어요.

 

中村文則 <遮光> 新潮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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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책을 느리게 읽는 망한 사랑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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