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기관

다카하시 히로키 <두드리다>

일어번역가 이진아 2026. 2. 20. 19:19
 일상의 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한 단편집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깔린 불편함과 위태로움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을 묶은 단편집입니다.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개인에서 사회, 자연으로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게 특징이에요. 읽고 나서는 "이게 무슨 얘기지?" 하는데 곱씹다 보면 점점 그 진가가 드러나는 책이었습니다.
 표제작인 <두드리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직장에서 잘릴 위기에 놓여 있고, 도박으로 빚을 지며, 결국 강도 사건에 가담했다가 동료에게 배신당합니다. 집주인 할머니에게 얼굴을 들킨 그는 할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부엌에 갑니다. 그런데 살인은 해본 적이 없어서 목이 타니까 일단 물을 마셔요. 그런데 갈증이 해소되고 나니 또 배가 고픈 것 같아서 옆에 놓인 옥수수도 먹고요. 좀 이상하죠? 이야기는 이렇게 남자가 남의 집 안에서 배회하며 먹거나 티비를 보고, 선풍기를 트는 등의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자의 행동과 생각을 보고 있으면 약간 혼란에 빠지게 돼요. 일상적인 행동을 보면 나와 다를 바 없는 시민이잖아요. 근데 살면서 점점 도박이며 위험한 아르바이트 등으로 빠지는 것을 보면 또 조금만 열심히 살면 괜찮을 것은데 왜 저러지 싶거든요. 한 인간이 어떻게 무너져 범죄자가 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마지막에 진짜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 외에는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이켜보는 남편의 시점을 통해 그 관계의 파탄을 추측하는 내용도 있고, 우리가 편리하게 이용하는 생활 환경의 이면에 있는 환경과 자본주의의 문제라든가,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서 청춘 남녀의 행복한 일상을 배경으로 바다의 위험성을 같이 드러내는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과 함께 <풍력발전소>라는 단편이 좋았습니다. 작가인 화자가 풍력발전소 마을을 방문하는 내용이거든요. 그 언덕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얀 풍력발전기가 주는 목가적인 분위기와 함께 전기를 일으킬 만큼 휘몰아치는 바람이 주는 양면적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약간 무력한 개인이라는 허탈함도 느꼈고요.
 전체적으로 명확하게 내용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독자가 스스로 추측하도록 하는 구성이에요. 무언가 긴박하고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닌데 은근히 오싹하고 섬뜩한 느낌이 깔려 있어서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글이더라고요. 스스로 설정이나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분에게 추천할게요. 다만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사건의 해소가 뚜렷한 서사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다소 밍숭맹숭하거나 불친절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高橋弘希 <叩く> 新潮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