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에 사로잡힌 인간군상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며 과학과 종교, 윤리 등에 있어 '인간의 경계'를 묻는 작품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가나코라는 중학생 소녀가 열차에 치여 생사를 오가는 부상을 입은 와중에 병실 침대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에요. 두 번째 사건은 여러 소녀들의 절단된 신체 부위가 상자 속에 담겨서 발견되는 것이고요. 이 사건은 각각 별개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며 그 연결고리가 드러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장광설'로 유명한 교고쿠도의 대사일 거예요. 전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일명 '백귀야행 시리즈'에서 교고쿠도는 현대인의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와 달리 동물권을 생각하는 시대를 사는 것처럼 그 시대의 보편적인 사고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그런가 교고쿠도는 본인이 직접 나서기를 꺼려하는 편이라고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사건의 스케일이 커지면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요. 이전 작인 <우부메의 여름>에서 진작 교고쿠도가 나섰으면 세키구치가 그 지경;은 안 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2권 만에 이렇게 행차해서 너무 놀랐고요. 작중에 사이비 종교 교주와 대치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교주가 "아니 그게 무슨 말.." 이 한 마디 하는데 교고쿠도가 혼자 10페이지 넘게 떠드는 데 이걸 대체 누가 이기지..? 싶은 그 대사와 연출이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내용은 겉으로는 불행을 떨쳐내고 싶어 사이비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들과 재벌가의 혼외자식을 두고 벌어지는 재산 문제, 소녀들만 골라 살해하여 시신을 절단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 상자에 대한 이상한 집착 등 자극적인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무엇을 인간이라고 규정하는가' '신념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에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것이고, 그렇기에 그 교고쿠도도 괴로워하며 직접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마지막에 교고쿠도의 무대광풍이 휘몰아치는데 정말 압도되어 읽었어요. 과학과 생명 윤리에 대한 것이라든가,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것이 인간을 발전시키기도 또 파멸시키기도 한다든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등 진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백귀야행 시리즈의 또 다른 인기 요소라면 역시 에노키즈 아니겠어요? 약간 좌청룡 우백호처럼 교고쿠도와 에노키즈가 버티는 가운데 끼어서 맨날 이리저리 치이는 세키구치가 기본 구도잖아요. 이러니까 세키구치가 주기적으로 광기에 휩싸이는 것도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고요. 아무튼 여기서도 에노키즈는 그냥 혼자 달리는 폭주 기관차였고요. 한결같아서 넘 좋았어요. 좀 더 철학적으로 깊이 생각할 부분이 있는 기담을 읽고 싶다면 추천할게요. 저도 이어서 다음 권도 읽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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